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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하루 한 뼘씩 자라는 잎새들

무식이 하늘을 찌른다. 각종 모종 얻어 심은 한국 고추가 풍성하게 매달렸다. 요리책에 ‘홍고추’로 고명을 얹으라 해서 내년엔 빨간색 고추 모종 구해달라고 어르신께 부탁했다. “조금만 기다려 봐요. 초록색 고추가 빨갛게 익을테니.” 웃으시는 소리가 들린다. 세상에! 초록색 고추가 하나 둘 빨강색으로 물들었다.   올 여름 유기농 채소 가꾸느라 세월 가는 줄 모른다. 한인 어르신, 이웃 아저씨, 인터넷 뒤지며 연구에 몰두한다. 배우는 것만큼 기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아는 것이 힘이다, 먹어야 산다’를 열창하며 그동안 아는 체하며 까불었던 과거에 고개 숙인다. 애들 키우며 사업하느라 발뒷꿈치가 갈라 터지도록 이리 뛰고 저리 달리느라 ‘흙 밟아 본 적이 없다’는 나의 처절한 변명.   근동에서 땅 부자로 소문난 아버지는 내가 두살 되던 해 돌아가셨다. 논 밭에 나가 본 적이 없던 어머니는 그 때부터 혼신을 다해 농사일에 매달렸다. 머슴이고 집사인 삼만이 아재와 농사꾼들과 함께 하루 종일 밭고랑을 매고 풀을 뽑았다.   유년의 기억 속 어머니는 하얀 수건을 머리에 동여매고 무명 소복을 입고 있다. 옥이언니 등에 업혀 밭고랑을 오락가락 하다가 칭얼대면 언니는 핑크색에 동백 꽃무늬가 새겨진 박음질이 촘촘한 포대기를 풀고 어머니 품에 날 내렸다. 어머니 가슴을 비집고 젖줄이 곤고한 젖무덤을 더듬으면 황토색 흙냄새가 스며 들었다.   “현풍댁은 저리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 일꾼들만 부려도 잘 먹고 살텐데.” 동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찼다. 어머니 오른쪽 손목은 모진 호미질로 휘어졌다. 땅은 먹거리를 생산하는 삶의 터전이지만 남매의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이였다. 어쩌면 어머니는 청상과부의 한많은 아픔을 매일 땅 속에 묻고 있었는지 모른다.   ‘애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큰다’며 대청마루 기둥에 어머니는 숯덩이로 금을 그어 키를 쟀다. 자식들이 흙에서 돋은 채소처럼 푸릇푸릇 건강하게 자라 땅 속 깊이 뿌리내리고 흔들려도 꺾이지 않는 수양버들로 살아남기를 바랬다.   정말이지 텃밭의 채소들은 자고 나면 한 뼘씩 자란다. ‘호박꽃도 꽃인가’란 염려는 무식의 대참사다. 다섯 손가락 벌린 채 관능적으로 굽은 연노란 꽃잎을 밀어내고 매끄럽고 반질반질한 호박이 달린다. 조롱조롱 매달린 방울 토마토는 물주며 군것질 하듯 따먹고 삼만이 아재 주먹처럼 단단한 토마토는 너무 열심히 먹어서 얼굴이 빨게질까 걱정이다. 지중해식단에 몰입해 올리브오일 듬뿍 부어 오븐에 구워 얼리면 겨울내 양식이 된다. 소금에 살짝 간 한 가지는 구워 얼린 뒤 토마토 소스에 마쯔렐라 치즈 뿌려 오븐에 구워내면 멋진 이태리 요리가 된다.   어머니 생전에는 손가락 까딱 안하고 차려주신 음식을 잘 먹었다. 도와드리는 척 폼 잡다가 흡입식으로 퍼먹고 ‘피곤할 텐데 쉬어라’는 말 떨어지기 무섭게 소파에 늘부러졌다. 당신이 떠나면 ‘뭘 해 먹고 사나’ 걱정 되신 어머니는 요리 잘하는 분에게 요리 비법을 전수시키며 딸의 안위를 신신당부 했는데 파토가 났다.   추석이다. 갖은 나물과 전 부쳐 지인들과 나눠 먹던 엄마 생각에 콧등이 찡하다. 궁하면 통한다. 슬픔을 거두고 약식과 감주 만들어 친구들과 먹을 생각을 한다. 음식을 니눠먹는 것은 사랑의 향기를 가슴에 담는 일이다.   최선을 다해 게으름 안 피우고 살게 되기를. 땅을 친구 삼아 머리 숙이는 일에 익숙해지면, 훗날 지구를 향해 홀가분하게 작별의 손 흔들 수 있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잎새들 어머니 가슴 어머니 생전 어머니 오른쪽

2024-09-18

[수필] 그리운 어머니

“외롭게 있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친구들과   어울리시고   즐겁게 지내세요”   어머니와 헤어진 지 벌써 26년이 되었군요. 그곳은 어떠신지요. 가끔 제 꿈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는 평소대로 편안하시더군요. 중환자실에서 정해진 시간에 어머니를 마지막 뵈며 예수님, 하느님만 부르며 기도하시라고 했더니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셨지요. 자식이 되어서 어머니를 가면 안 된다고 울면서 붙들지도 못한 것 지금 생각하니 그것 또한 불효였다고 생각됩니다. 어머니가 아프실 줄도 모르고 우리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서 주말이면 여행 다니며 즐겁게 지낸 것 역시 지금 생각하니 불효였습니다.     어느 날 여행에서 돌아와 미국이 너무 아름답고 신기한 것들이 많아 길게 편지를 드렸지요. 막내에게 들으니 어머니는 그 편지를 머리맡에 두고 맨날 읽으며 “네 언니는 글도 잘 써” 하며 막내를 은근히 약 올리셨단 얘기도 들었어요. 제가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어머니 잠옷 가운을 사다 드렸을 때 어머니는 뭐하러 사왔느냐고 하셨지요. 예쁘고 멋진 것을 좋아한 어머니를 저는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그로부터 20일 후에 저 세상으로 가셨으니 그때 많이 아프셨을 텐데 속없이 굴었어요. 여의도 오빠 집에서 편안히 계셨지만 손주들이 모두 미국에서 공부를 하였으니 하루종일 얼마나 외로우셨어요. 대전 산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 뵙지 않았던 것도 이제 와서 생각하면 후회가 됩니다.     시어머니께는 매월 15만원, 20만원을 드렸으면서 어머니께는 그것도 드문드문 뵈면서 3만원 용돈을 드린 것 또한 죄송합니다. 언젠가 어버이날에 옆에 사는 동생과 동행을 했는데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를 돌며 예산 초과를 하지 않으려고 수없이 왔다 갔다하며 결국 흑백 바둑 무늬 원피스를 샀습니다.     그런데 좋다고 하면서도 작은 언니 주셨잖아요. 어머니는 고운 색을 좋아하는데 예산한 돈에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요. 어머니는 제가 그 적은 용돈을 드릴 때마다 항상 고맙다고 하며 ‘너희들이 나의 힘이다’고 하셨지요. 말 없는 오빠와 살면서도 우리 집에 오면 오빠 올케언니 칭찬만 하셨지요. 그 흔한 고부 갈등 한번 털어 놓지 않으셨지요. 그래서 우리도 어머니께 배웠습니다.     어머니, 어머니께서 우리 애들을 보며 어쩜 그렇게도 조용히 공부도 잘 하냐고 하며 ‘너희 집은 천국이다’라고 하셨지요. 어머니, 아이들이 유학 끝나고 모두 미국에서 자리를 잡아 저희 부부도 옮겨와서 애들과 가까이 살고 있어요. 둘째 손녀를 보며 내가 능력이 없어 너희 엄마가 가고 싶은 대학도 못 보냈으니 그 소원 풀어 주라 하며 눈물을 훔치셨던 것 기억합니다. 그 애가 미국에서 대학교수가 되었답니다.     그리고 저는 전공하고 싶은 과를 못 갔어도 선생님이 되는 대학을 간 것 지금은 감사할 뿐입니다. 도시에서 학교 다니다가 방학이면 집에 내려가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그동안 쌓였던 얘기나 친구간의 스트레스를 조잘대면 다 응수하시며 제 편을 들어 주시면 저는 오히려 미안할 때도 많았습니다.     어머니, 인자하신 우리 어머니, 저는 가끔 어머니가 일본에서 사시며 아버지와 찍었던 신여성 어머니의 사진을 보곤 합니다. 우리 자매 여섯을 모두 합쳐도 어머니만한 인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 내조를 잘한 어머니. 어머니는 끔찍이도 아버지를 공경하고 노후에는 저녁이면 두 분이 장기를 두며 아버지의 속임수로 왈가왈부하며 즐거워하셨지요. 어머니, 아시겠지만 언니들 셋 모두 세상을 떠났어요. 이제 남은 4남매 중 저는 멀리 미국에 와 있고 한국에는 셋이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여동생 둘에게 너희만 없었다면 얼마나 편하겠냐고 하던 말씀이 서운해서 대표로 많이 울었지만 어느 날 외할머니께 호통을 맞으신 것을 보고 속이 후련했답니다. 그리고 어느 좋은 날 너희들이 없었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느냐고 하며 미안하다고 정식으로 사과하셨어요. 어머니의 말씀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신 사랑으로 다 알고 있지요.   어머니, 이제 저도 거울 속에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곤 합니다. 어머니가 양귀비로 염색을 해 귀가 땡땡 부으면 제가 왜 염색을 하냐고 불평을 했고 어머니는 그때 너도 늙어봐라 하셨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런데 어머니, 저는 염색한 검은 머리는 정말 싫어요. 그래서 뒤꼭지 머리 갈라진 부분만 갈색으로 살짝 염색하지요. 이제는 염색약도 좋아져서 귀도 붓지 않아요.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와의 일들이 또렷해집니다. 어머니 생전에 말씀하길 너희들 오기만을 기다리며 외롭게 사느니 친구가 많은 양로원에  보내달라고 하셨지요. 외롭게 계시지 말고 하늘나라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지내세요. 계절의 여왕 5월에 어머니의 가슴에 카네이션 한송이를 달아 드립니다. 이영희 / 수필가수필 어머니 신여성 어머니 어머니 잠옷 어머니 생전

2022-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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